본문 바로가기

사이버교실/역사

<한국역사이해 3>대한민국의 독립과 통일을 열망한 지도자 - 김구 김구 (한국 독립운동가·정치가) [金九, 백범] 1876. 7. 11 황해도 해주~1949. 6. 26 서울.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1892년(17세)에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한다. (그 당시 돈을 주고 과거를 대신 치르게 하거나 감독관에게 돈을 주어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 많았다.) 1894년(19세)에 동학사상에 심취하여 동학의 접주가 되는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김구는 그해 9월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 더보기
<한국역사이해 2> 미군, 한국군의 '좌익 집단처형' 묵인 출 처 : http://cafe.daum.net/anti-newright 글쓴이 : 하얀코뿔소 "미군, 한국군의 '좌익 집단처형' 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국군은 남쪽으로 급하게 후퇴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국군과 경찰이 좌익인사와 동조자 상당수를 집단으로 학살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를 알고도 묵시적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AP통신은 전했습니다. 미군의 이 같은 태도는 서울이 수복된 1950년 가을까지 계속됐다는 게 AP 통신의 주장입니다. AP 통신은 미 국립문서보관소 등의 비밀해제 기록을 조사해 미군 장교들이 '집단처형'을 참관하고 카메라에 촬영까지 한 뒤 상부에 보고한 사실.. 더보기
<한국역사 이해 1> 친일파가 김구를 죽인 이유 친일파가 김구를 죽인 이유 출처 : http://blog.hani.co.kr/scorpion/27119 라는 하지중장의 말 한마디가 죽을 위기를 맞아 떨고 있던 친일파들을 송두리째 구원해준다. 하지의 생각은 단순했다. 사상을 검증하기 힘든 애국투사들보다 일제 강점기시절부터 반공성향이 투철한 친일파들이 보다 더 미더워했던 것이다. 이런 미군정의 친일파 보호정책으로 악질친일파매국노들은 해방정국에서 사법부와 군부 그리고 경찰요직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준열사를 기리는 추모식에서까지 이들 친일파가 대거 단상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뜻있는 인사들은 이준열사가 눈을 감기 힘들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던 것이다. 친일파를 보호하고 자신의 휘하에 영입한 것은 미군정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유지지기반이 .. 더보기
신문으로 보는 을사조약 중앙일보 2010년 8월 25일자를 통해 보는 을사조약... 국사가 이미 국민으로 부터 멀어진 지금 신문에서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어서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게시판에 올린다. 먼저 을사조약이란 무엇인가? 을사조약 :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된 명백한 불법적인 국권침탈조약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