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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교실/역사

신문으로 보는 을사조약


중앙일보 2010년 8월 25일자를 통해 보는 을사조약...
국사가 이미 국민으로 부터 멀어진 지금 신문에서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어서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게시판에 올린다.

먼저 을사조약이란 무엇인가?

을사조약 :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된 명백한 불법적인 국권침탈조약

일제의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는 11월 17일 한국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를 불렀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 체결했다(→ 을사오적).
그 내용은 제1조 일본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監)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다음으로 조선을 망하게 한 3대 조약을 알아보자.

1. 태프트 가쓰라 미- 일 조약 ( 1905년 7월 29일)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 총리 가쓰라 다로가 맺은 조약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인정
    - 미국의 필리핀 지배 확인

2. 제2차 영-일동맹 조약( 1905년 8월 12일)
영국 헨리 랜스다운 외상과 일본 하야시 다다스 주영일본공사가 맺은 조약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도 - 감리 - 보호 조치 승인
    - 영국의 영광스러운 고립정책 탈피

3. 포츠머스 러-일 조약( 1905년 9월 5일)
러시아 세르게이 이 비테 전 재상과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맺은 조약
    -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도-보호-감리 조치를 취하는데 러시아가 방해 - 간섭하지 않음
    -보스턴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한 군수공장 건물에서 벌어진 이 조약은 중재를 한 시니도어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게하였지만 조선에게는 식민지전락이라는 잔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조약이 있게한 세  전쟁을 알아보자.

1. 청일전쟁

일본은 메이지유신이후 근대적해군을 창설하고 1880년부터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군함등 신식무기를 구입하고 또기술을 연마하여 국방력을 키웠다. 그렇게해서 청나라한테 한번 써먹어보았던겄이다. 청나라 이홍장은 북양함대를 창설하고 매년 200만냥씩 들여 국방을 키우고있었는데 마침 청나라서태후가 1888년부터 북경에 이화원을 뱃놀이 하기위해서 건설하고 있었는데 자금이 모자라자 그돈을 빼돌려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에 청나라는 조선성환과 공주에 3000명의 군인을 배치하고잇었는데,일본군이 기습하여 청을 작살내고 말앗다.이홍장은 즉시 청군 14,000명을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군과 대치하고 일본군은 제5사단 17,000명을 평양전투에서 투입되었다. 청나라군인은 오합지졸이고 군기가빠져있었다,일본군은 정에부대로 군기가있고 최신무기로 무장되어있는 군인이었다. 대동강을 사이에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졋다.청군은 2,000명이전사하고 수백명이 포로로잡혓다. 일본군은 180 명이 전사했다.승리한 일본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챙겻다. 청아라 북양함대와 일본함대가 암록강 대동구에서 만나서 5시간동안 해전이 발생했는데 여기에서도 청군함대는 침몰하고 말앗다. 일본군은 중국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여순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유리한 조약을 이끌어내기위해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철저하게 박살을 내었다. 전쟁7개월만에 청나라는 일본에 항복하고 청나라 실권자 북양대신 이홍장은 창피를 무릅쓰고 일본 시모노세키에가서 굴욕적인 종전회담을 맺을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요구조건은 조선을 확실한 독립과 자주나라임을 인정할겄,청나라 봉천성 남부땅과 대만 그리고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할겄,그리고 막대한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겄은 수백년동안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잇는겄을 세계열강들이 알고잇는데 조선을 곧바로 먹어버리면 열강들이 가만이 있지않을겄같아서 청과 조선을 때어놓은 수순을 밟아 놓은겄이다.

2. 동학농민전쟁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항하여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1894년 11월 경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청나라를 화력으로 쓰러뜨린 일본군에게 있어 조선 의병은 싸움거리가 안되는 대결이었다. 이 전쟁에서 동학농민군 5만명이상이 살해당하였다.

3. 러일전쟁
일본이 청나라를 작살을 내버리고 요동반도를 먹어버리자 러시아가 들고일어났다, 러시아는 유럽에 발틱함대가잇는데 영국이 버티고있어 대서양은 엄두가 안나고 페르시아쪽으로 남하할려고 했으나 영국의 견제로 남하할수없고 그래서 아시아 불라디보스토크에 태평야함대를 설치하고 잇었던것이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에 얼어버리는 부동항이라 제기능을 다하지못하는 항구였다, 호시탐탐 중국 요동반도에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설치할려고 계획을 하고있는데 일본이 요동반도를 먹어버렸으니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과 연합하여 일본에 압력을 넣었던겄이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에 내주면서 언젠가는 이원수를 값으리라 하고 10년동안 군비를 증강하여 10년후에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 러일전쟁을 발생했던겄이다.

러시아 함대는 우리나라 남해안을 통과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 함대에게 기습을 당해 전멸한다.

러일전쟁은 청일전쟁의 10배정도 더큰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만들어 아시아의 맹주로 자리잡았던겄이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 폐배하여 러시아 리콜라이2세황제가 붕괴되고 불세비키혁명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공산주의가 태동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겄이다,이렇게 한반도는 세계 정치적을 큰흐름으로 작용헀던것이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압력을넣어 요동반도를 먹지못하게 만들고 청으로부터 시베리아 휭단철도권을 따내어 철도를 부설하여 요동반도 여순에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설치하여 열강대열에 끼었던겄이다. 조선의 명성황후는 일본이 러시아한테 밀리자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에 가까워지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로할일을 저질렀던겄이다

한국역사에 치욕수런 을사조약의 배경이 된 3개 조약은 아래 두사람의 말을 읽어보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서구열강에 의해 무수한 침탈을 당했던 청나라 2세인 마이클 자오의 말을 인용해본다.
" 청나라는 국제적 배신을 무수히 당했다. 배신을 기억해 역사의 경계로 삼는다. 하지만 배신 문제에 몰입하지 않는다. 역사 패배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포츠머스 역사연구회의 피테 맥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정글의 법칙이 난무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은 평화를 맛볼 자격이 없었다. 그 평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구걸하는 평화는 위선의 독소로 썩는다. 경제력 - 군사력이 없으면 평화는 얻을 수 없다."